제주4.3사건 진압과정 중 초토화작전으로 불타고 복구되지 못한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잃어버린 마을이 4.3보고서에는 83개나 있다고 합니다. (130개라고 적고 있는 자료도 있습니다.)

초토화작전 당시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중산간 마을들은 모두 소개되어 불타 사라졌는데, 4.3 진압 이 후 복구된 마을도 많지만 아예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습니다. 다랑쉬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입니다.

 

위치

경도  126 : 49 : 42
위도  33 : 28 : 1

아름다운 다랑쉬오름(월랑봉) 탐방로 입구에서 서쪽으로 약 100m 지점에 있습니다. 제주 동부 오름과 해안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고, 화산의 신비를 간직한 다랑쉬오름은 이제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바로 인근에 용눈이오름이나 아부오름 등이 있어 이 인근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마을

제주 동부에서 가장 가파른 다랑쉬오름(월랑봉) 아래에 있던 마을로, 10여개 가호와 40여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모두 해안마을로 피신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진] 인근 아부오름에서 바라 본 다랑쉬오름

 

 

이 마을터에는 입구에 나무로 된 비목이 서있습니다. 지금은 글씨가 많이 흐려져 사진으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다랑쉬마을’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작은 비목이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이 곳에 서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행히 이 비목만큼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4.3관련 유적들이 우익단체들에 의해서 훼손되어 왔던 일들이 왕왕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곳에는 마을의 중심이였을 팽나무와 표석이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도 이 주변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연못터 등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랑쉬굴

잃어버린 마을 중 ‘다랑쉬 마을’이 더 유명(?)하게 된 것은 마을자체 보다도 ‘다랑쉬 굴’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인근에 있는 ‘다랑쉬 굴’에서 1992년 4.3당시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11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유족의 바램과 달리 그 유골들은 모두 화장되었고, 다랑쉬 굴의 입구는 큰 바위로 굳게 막혀 있어서 굴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게 현실입니다. 4.3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이를 보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랑쉬 마을 표석 전문

잃어버린 마을 – 다랑쉬-

  여기는 1948년 11월 경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 마을터이다. 다랑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월랑봉, 높이 392m)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다랑쉬라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정겹다. 주민들은 산디(밭벼) 피, 메밀, 조 등을 일구거나 우마를 키우며 살았다. 소개되어 폐촌될 무렵 이 곳에는 10여 가호 4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지금도 팽나무를 중심으로 연못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고 집터 주변에는 대나무들이 무더기져 자라 당시 인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이 마을은 1992년 4월 팽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다랑쉬 굴에서 11구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도민들에게 4.3의 아픔을 다시 한번 새겨주었다. 당시 시신 중에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의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 다니던 부근 해안마을 사람들로 1049년 12월 18일 희생되었다. 지금도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은 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상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빠져 4.3과 같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제가 바보였던 것일까요?

아래의사진을 가지고 다랑쉬 굴을 찾아 갔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 정도 사진이면 찾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 근처가면 작은 이정표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산산히 부서지고, 이정표는 커녕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시간여를 가시나무에 찔리며 억새밭을 헤매었지만, 찾아 오는 것은 갈증과 밤의 어두움 뿐이였습니다.

 

 

다랑쉬굴 사건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합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치며 굴속에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웁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질식해 죽게되고, 안에 있던 희생자는 11명이고, 이 중에는 여성 3명과 어린이 1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랑쉬굴은 1992년 세상에 알려집니다.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이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하고, 1992년 4월 2일 첫 보도와 이 후 조사로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사건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사진] 발견당시 다랑쉬 굴 내부의 희생자 유골들

 

 
[사진] 사람들이 이 안에서 살았음을 보여주는 솥 등 생활용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진] 지금은 이렇게 큰 바위로 굴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끝나지 않은 4.3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는 것이였으나, 얼마 후 행정,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인해 유골들을 화장하기로 결정됩니다. 결국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고, 다랑쉬굴은 큰 바위로 봉쇄되어 버립니다.

이 다랑쉬굴 내부에는 현재도 당시 사용했던 솥, 항아리 등 생활잡기들이 널려진 채 있다고 합니다. 굴 입구만이라도 찾아보고자 했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으로 그 실체조차 잊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덧붙임

“제주 역사 기행” 책에 다랑쉬 굴을 도민의 기억속에서 지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현장 위치를 파악한 후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위 내용 및 사진은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에 전시된 것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1. 김금복 2018.05.23 05:00 신고

    다랑쉬굴에서 죽은 고인들을 제주4.3의 희생자로 여겨서 수많은 동정의 글들과 과잉진압을 비판하는 글들이 많이 보이는데, 왜곡되어도 한참이나 거꾸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동광리와 애월(빌레못굴) 사건은 양민에 대한 반인륜적인 토벌임이 맞지만, 다랑쉬굴 사건은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제주4.3의 원인을 원초적으로 제공하여 제주를 피로 물들게 하고 제주를 비극으로 몰고 간 남로당 좌익 세력들입니다. 종달리 채정옥 옹의 증언을 간단히 들어만 봐도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굴은 남로당 패거리들의 아지트였습니다. 그들은 다랑쉬굴 진압사건이 벌어진 전날 밤, 세화리를 대습격하여 43명의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138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좌익세력과 연관이 깊은 무리들입니다. 굴 속의 3명의 여인들은 남로당 폭도들에게 취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던 이들이고, 이재수라고 하는 어린이는 그 중의 한 여인의 아들이던 것입니다. 채 옹은 김호준 외 3명과 함께 남로당 패거리들에게 포섭되어, 김호준은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채 옹(초등학교 교사)은 회유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굴 속에서 지내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한 그들은 자신들의 죄값을 다 치른 것이며, 결코 제주4.3의 희생자들이라고 추대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념에 속아 넘어간 이념의 희생자일지언정, 제주4.3의 희생자는 결코 아닙니다. 검색을 통하여(특히 채 옹과 김병수 당시 세화리장의 증언) 더 많은 자료들을 접하여 올바른 판단과 식견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굴 속에서 각종 생활도구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자료들을 더 자세히 뒤져보면, 거기서 총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지, 철모와 탄띠, 탄피, 대검 등도 발견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들이 입산파 무장대임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우익에 기운 사람도 아니고, 나는 중립적으로 판단하여 하는 말이며, 우익 인사의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채 옹의 증언 한 가지만 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깡패 수준의 군경들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과잉진압은 극악한 역사적 과오이긴 했습니다. 내 고향이 종달리 서동이며, 채 옹의 얼굴도 좀 아는 사람입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다랑쉬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왜곡되었습니다.

  2. 김금복 2018.05.24 05:50 신고

    채 옹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미군정이 실시한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종달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다른 4명과 함께 좌익 폭도들(학교 동창 오달용 등)에게 붙잡혀 협박에 굴복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했다고 분명히 증언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는 반강제적인 남로당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증언에는 구좌면당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남로당 구좌면당이라는 말입니다. 제주4.3에 대해서 대정면당, 한림면당, 남원면당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렇게 그 당시 남로당 세력이 숫자에 비해서 매우 조직적이고 세력이 강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해방 직후 만들어진 건국위원회 역시 좌익 세력에 의해 조직된 겁니다. 미군정은 이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과 협력하여 군정을 실시하다가, 좌익 색채가 짙어지자, 탄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공교롭게 발생한 3.1절 사건을 통해서 관성력을 얻은 좌익 세력이 4.3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남로당 구좌 총책 정권수는 다랑쉬굴이 토벌 당했으니, 가서 시신들을 수습하라고 채 옹과 다른 2명을 보냅니다. 채 옹은 다랑쉬굴의 시신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마을에 알리는 식으로 요란을 떨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남로당원이고, 죽은 사람들도 같은 남로당원들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렇게 토벌 당하여 죽을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채 옹은 한국전쟁 발발로 입대하고 참전하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과거 좌익 활동의 경력 때문에, 당국의 종용으로 우도초등학교 교편을 끝으로 강제적으로 교단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좌익 무장대들 중에는 무기가 모자라서 창과 칼 등을 갖춘 이들이 많았습니다. 굴 속에서 그것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세화리 대습격으로 충격을 받은 군경은 이튿날 바로 보복활동에 나섭니다. 당시 세화리장 김병수 씨도 같이 참여한 사람인데, 그의 증언에는 "양민이 왜 이 굴에서 살겠습니까? 그들은 입산파 무장 공비들임이 틀림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어느 글에 이런 게 있습니다. "당시 다랑쉬 오름은 구좌면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굴 속에서 지냈던 그들은 양민이기는커녕 그 유격대 당사자들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맞지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