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빠져 4.3과 같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제가 바보였던 것일까요?

아래의사진을 가지고 다랑쉬 굴을 찾아 갔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 정도 사진이면 찾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 근처가면 작은 이정표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산산히 부서지고, 이정표는 커녕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시간여를 가시나무에 찔리며 억새밭을 헤매었지만, 찾아 오는 것은 갈증과 밤의 어두움 뿐이였습니다.

 

 

다랑쉬굴 사건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합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치며 굴속에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웁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질식해 죽게되고, 안에 있던 희생자는 11명이고, 이 중에는 여성 3명과 어린이 1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랑쉬굴은 1992년 세상에 알려집니다.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이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하고, 1992년 4월 2일 첫 보도와 이 후 조사로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사건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사진] 발견당시 다랑쉬 굴 내부의 희생자 유골들

 

 
[사진] 사람들이 이 안에서 살았음을 보여주는 솥 등 생활용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진] 지금은 이렇게 큰 바위로 굴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끝나지 않은 4.3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는 것이였으나, 얼마 후 행정,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인해 유골들을 화장하기로 결정됩니다. 결국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고, 다랑쉬굴은 큰 바위로 봉쇄되어 버립니다.

이 다랑쉬굴 내부에는 현재도 당시 사용했던 솥, 항아리 등 생활잡기들이 널려진 채 있다고 합니다. 굴 입구만이라도 찾아보고자 했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으로 그 실체조차 잊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덧붙임

“제주 역사 기행” 책에 다랑쉬 굴을 도민의 기억속에서 지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현장 위치를 파악한 후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위 내용 및 사진은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에 전시된 것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1. 김금복 2018.05.23 05:00 신고

    다랑쉬굴에서 죽은 고인들을 제주4.3의 희생자로 여겨서 수많은 동정의 글들과 과잉진압을 비판하는 글들이 많이 보이는데, 왜곡되어도 한참이나 거꾸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동광리와 애월(빌레못굴) 사건은 양민에 대한 반인륜적인 토벌임이 맞지만, 다랑쉬굴 사건은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제주4.3의 원인을 원초적으로 제공하여 제주를 피로 물들게 하고 제주를 비극으로 몰고 간 남로당 좌익 세력들입니다. 종달리 채정옥 옹의 증언을 간단히 들어만 봐도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굴은 남로당 패거리들의 아지트였습니다. 그들은 다랑쉬굴 진압사건이 벌어진 전날 밤, 세화리를 대습격하여 43명의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138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좌익세력과 연관이 깊은 무리들입니다. 굴 속의 3명의 여인들은 남로당 폭도들에게 취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던 이들이고, 이재수라고 하는 어린이는 그 중의 한 여인의 아들이던 것입니다. 채 옹은 김호준 외 3명과 함께 남로당 패거리들에게 포섭되어, 김호준은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채 옹(초등학교 교사)은 회유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굴 속에서 지내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한 그들은 자신들의 죄값을 다 치른 것이며, 결코 제주4.3의 희생자들이라고 추대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념에 속아 넘어간 이념의 희생자일지언정, 제주4.3의 희생자는 결코 아닙니다. 검색을 통하여(특히 채 옹과 김병수 당시 세화리장의 증언) 더 많은 자료들을 접하여 올바른 판단과 식견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굴 속에서 각종 생활도구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자료들을 더 자세히 뒤져보면, 거기서 총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지, 철모와 탄띠, 탄피, 대검 등도 발견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들이 입산파 무장대임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우익에 기운 사람도 아니고, 나는 중립적으로 판단하여 하는 말이며, 우익 인사의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채 옹의 증언 한 가지만 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깡패 수준의 군경들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과잉진압은 극악한 역사적 과오이긴 했습니다. 내 고향이 종달리 서동이며, 채 옹의 얼굴도 좀 아는 사람입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다랑쉬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왜곡되었습니다.

  2. 김금복 2018.05.24 05:50 신고

    채 옹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미군정이 실시한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종달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다른 4명과 함께 좌익 폭도들(학교 동창 오달용 등)에게 붙잡혀 협박에 굴복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했다고 분명히 증언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는 반강제적인 남로당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증언에는 구좌면당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남로당 구좌면당이라는 말입니다. 제주4.3에 대해서 대정면당, 한림면당, 남원면당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렇게 그 당시 남로당 세력이 숫자에 비해서 매우 조직적이고 세력이 강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해방 직후 만들어진 건국위원회 역시 좌익 세력에 의해 조직된 겁니다. 미군정은 이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과 협력하여 군정을 실시하다가, 좌익 색채가 짙어지자, 탄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공교롭게 발생한 3.1절 사건을 통해서 관성력을 얻은 좌익 세력이 4.3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남로당 구좌 총책 정권수는 다랑쉬굴이 토벌 당했으니, 가서 시신들을 수습하라고 채 옹과 다른 2명을 보냅니다. 채 옹은 다랑쉬굴의 시신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마을에 알리는 식으로 요란을 떨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남로당원이고, 죽은 사람들도 같은 남로당원들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렇게 토벌 당하여 죽을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채 옹은 한국전쟁 발발로 입대하고 참전하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과거 좌익 활동의 경력 때문에, 당국의 종용으로 우도초등학교 교편을 끝으로 강제적으로 교단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좌익 무장대들 중에는 무기가 모자라서 창과 칼 등을 갖춘 이들이 많았습니다. 굴 속에서 그것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세화리 대습격으로 충격을 받은 군경은 이튿날 바로 보복활동에 나섭니다. 당시 세화리장 김병수 씨도 같이 참여한 사람인데, 그의 증언에는 "양민이 왜 이 굴에서 살겠습니까? 그들은 입산파 무장 공비들임이 틀림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어느 글에 이런 게 있습니다. "당시 다랑쉬 오름은 구좌면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굴 속에서 지냈던 그들은 양민이기는커녕 그 유격대 당사자들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맞지요.

지난 4월 3일 4.3평화공원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늦었지만, 정리하고 공유하고자 합니다.

 

노대통령님 서거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4.3사건을 가지고도 좌우에서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지난 세월을 들춰내어 무엇하겠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듯이 화해와 상생은 진실을 규명하고 난 이후에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덮어 버리면 그 이면의 갈등은 영구적으로 치유될 수 없습니다.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진실을 규명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힘든 길을 거쳐야 합니다.

 

이번 포스팅은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었던 4.3사진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라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깨진 솥단지 등 생활용품 - 당시 이 척박한 산속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서 살아야 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 내부 - 숨어 살기 위해서 이 곳 다랑쉬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서 모두 학살되었다. 발견된 유골은 유족에 대한 압력으로 모두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고, 굴 입구는 큰 바위로 막아서 폐쇄해 버렸다. 현재 이 다랑쉬굴 입구를 일반인이 찾기는 어렵다.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 - 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던 곳으로 당시 최대 학살사건으로 꼽힌다. 제주에서는 어린 아이가 죽으면 묘를 쓰지 않는 전통이 있다. 수습되지 않았던 아이들을 묻은 작은 묘가 수십여기가 있다.

 

 

정방폭포 –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4.3당시 최대의 학살터였다. 폭포 위의 건물은 일제시대의 단추공장이다. 4.3당시 이 공장건물에 갇혀 있다가 폭포 위에서 학살되었다. 앞서 소개한 북촌리 사건과 비슷한 점은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없는 군인과 경찰들에게 학살을 하도록 해서 담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다는 진술이 있다.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 – 이 곳은 일제시대의 비행장인 알뜨르비행장 인근에 위치한 탄약고터였다. 태평양전쟁말기 탄약고를 폭파시키면서 거대한 구멍이 생겼는데, 이 곳에서 수백명이 학살되었다.

수년동안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보니 시신이 모두 엉켜 있었다고 한다. 결국 시신은 인근 백조일손지묘에 함께 안장되는데, 이는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의미이다.

 

 

낙원동성 – 4.3당시 초토화작전(해안으로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 마을을 말그대로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거치면서 해안지역 마을에는 성을 쌓고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성을 쌓고 죽창을 들고 지켜야 했다. 현재는 남아 있는 곳이 얼마 없지만 해안 모든 마을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비목 – 4.3당시 무장대에 의해 순직한 경찰의 비목, 모든 사람이 피해자이다.

 

 

농업학교 – 미군정, 제9연대, 제2연대 등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하며 수용소의 역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구금되어 있다가 학살되었다.

 

 

감찰청 – 제주경찰청의 전신인 제주경찰감찰청의 4.3당시의 모습, 문 밖으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1. magijm 2009.06.03 22:11 신고

    무조건 덮어버리는 것은, 용서도 아니고, 화해는 더더욱 아닙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내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하게 알면서도,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를 청하지 않아도, 복수는 하늘이 해 줄 것을 믿고, 자기 자신은 상대방을 향해 웃어주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하늘 아래서 가능하기나 하겠냐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지만, 그리고 실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저로서도, 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용서로 바꿔야 하는 힘든 점이 있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골병 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골병 들게 됩니다. 화병이 나거나, 분에 못 이겨서 제 명에 못 살 거예요. 여하튼 용서라는 건, 그저 덮어두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화해라는 건, 상대방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할 때 가능하다는 것. 둘 다 사람에게 속한 것은 아닌 듯 한데, 그래도 사람으로 살면서 용서하거나 화해하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는데도, 후회는 없겠죠.

    • k2man 2009.06.04 12:04 신고

      말씀처럼 정말 사람이 진정성있는 용서와 화해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일본의 이번 망언으로 제주도민으로써 말로 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전에는 우리나라의 한 국회의원이 제주도 독립이 어쩌고 말을 했다가 제주도민에게 엄청난 질타를 받았었습니다. 제주도가 왜 그리 민감한지, 제주도의 근현대사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것은 일본이나 국내 정치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4.3사건 등으로 큰 난리를 겪었던 제주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당선되려면 무조건 "무소속"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이 있었고, 최근에는 조금 다르지만 한때는 실제로 그랬었으니까요.)

근현대사에 있어서 제주도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학살과 피해를 겪지 않은 지역이 없겠지만, 제주도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될 날이 멀어 보입니다.

제주도의 근현대사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 대정으로 가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일제는 오키나와가 점령당하자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기 시작합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결7호 작전(제주도 방어 작전)을 세우고 관동군 2개 사단과 일본 본토 부대까지 7만 5천이 넘는 병력을 제주도에 집결시킵니다.

1. 송악산 해안진지동굴

대장금의 마지막 이 장면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이 장면의 장소가 다름 아닌 송악산 해안 땅굴입니다. 가미카제 작전이 비행기를 이용한 작전만 실행에 옮겨 졌지만, 실제로는 자폭 고속잠수정 작전까지 존재합니다. 해안으로 오는 적 상륙함대를 맞서기 위한 자폭 잠수정을 숨겨두기 위해 만들어진 해안 땅굴이 바로 이 곳입니다.

 

2. 비행기 벙커

이 대정지역에는 이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유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바로 이 지역에는 알뜨르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비행장으로 당시 제주비행장이던 제주공항과 함께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비행장에 보관되는 항공기의 벙커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 가면 수 십개의 벙커가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 콘크리트 두께가 1m가 넘을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어 졌으며, 과거에 이 벙커들을 철거하려고 폭약을 터트려도 도저히 부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의 스카이뷰로 본 사진입니다. 빨간색 원 부분이 바로 저런 벙커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실제 그 지역을 가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3. 알뜨르 비행장

이 뿐만 아닙니다. 당시 알뜨르 비행장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일제에 강제로 빼앗겼던 비행장부지는 아직도 지역주민에게 돌려지지 않고 공군에서 점유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비행장은 아래 사진보다 훨씬 넓지만 우습게도 공군에서 지역주민에서 밭으로 일부를 임대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있는 부분은 유사시를 대비해서 항상 이런 상태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지역주민 소유였던 땅이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이후로 아직까지도 반환되지 않고 국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히려 지역주민에게 임대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4. 백조일손지묘

이 지역의 아픔은 또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일명 '백조일손지묘'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 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4.3사건과 6.25를 거치며 누명을 안고 학살된 분들을 모신 곳입니다. 이 당시 학살터는 제주도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습니다. 당시 학살된 사람만 적게는 2만, 많게는 8만까지 보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불타버려 증언해 줄 사람조차 없으니 말입니다. 신고된 사람만 2만 가까이 됩니다.

최근 4.3사건에 대해서 노무현대통령이 사과하고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와중에, 이에 대해서 우익단체에서 헌법소원까지 냈더군요.

이 곳이 그 분들이 돌아가신 곳입니다. 둘레가 500m는 될만하고 깊이가 20m는 됨직한 큰 구덩이 입니다. 이 구덩이에서 수 백명이 학살되었고, 후에 이 시신들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시신이 모두 엉켜있어 신원을 구분해 수습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충 유골을 사람 수만큼 수습하여 위에 나온 사진처럼 한 곳에 모셨습니다. '백조일손지묘'라는 이름도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습니다. 시신들이 모두 엉켜 있었어서 유족들 모두가 한 자손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5. 육군 제2훈련소 터

마지막 사진은 6.25전쟁 당시의 육군 제2훈련소 정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전쟁에 나갈 젊은 남자들을 끌어 모으지만 훈련시킬 적당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육군 훈련소가 생기게 됩니다.

6.25당시 이 대정지역이 제2훈련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정 입구 대도로변에 덩그러니 두 개의 콘크리트 기둥만이 남아 있습니다.

제1훈련소도 인접한 중문 근처 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끝나면서 제1훈련소는 폐쇄되고 대정에 있던 제2훈련소는 논산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논산의 제2훈련소가 숫자 2를 빼고 육군훈련소란 이름으로 바꾼지도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현장 사진이 많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항공사진으로 대체를 해서 많이 아쉽습니다.

다음 번에는 좀 더 많은 현장 사진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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