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제주4.3사건

4.3사건의 전개 - 3. 경찰의 발포와 4.3발발

k2man 2009. 6. 1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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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3월 1일,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3.1절 기념 집회가 열린다.

당시 시위로 오인한 미군정과 경찰은 매우 민감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말을 타고 가던 경찰이 넘어진 아이를 밟고 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항의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이날 7명의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되었다.

 

3.10 도민 총파업

 

이 사건에 대한 항의는 3.10 도민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당시 총파업은 제주도 민·관을 통틀어 95% 이상이 참여한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총파업이였다.

제주도청, 법원, 검찰 등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 뿐만 아니라 일부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하였다.

 

레드 아일랜드, 레드 헌트

이에 대해 현지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대령은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하였다. 여기에 한 술 더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한다.

여기서부터 정부와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지어 버린다.

이어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이 급파되었으며, 조병옥은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되고 연행자에 대한 고문이 시작된다.

 

이 후 더 큰문제는 극우청년단 “서북청년단(서청)”이 들어온 것이다. 부족한 경찰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들어 오기 시작한 서청은 1948년 초 760명에 이른다. 이 들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을 장악하였고, “빨갱이 사냥(레드 헌트)”를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하고 4.3사건의 한 요인을 제공한다.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 부터 1948년 4월 3일 4.3 발발 직전 1년 동안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달했다.

더구나 1948년 3월 연행되었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천지서, 모슬포지서, 그리고 서청에 의해서 죽어 갔다.

당시 고문치사로 희생된 분의 어머니는 이렇게 증언했다. (윤희춘 할머니, 작고하셨습니다.)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 백 년이고 아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무장봉기의 시작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했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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