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14

4월 3일, 정운찬 총리의 행보를 보며 느낀 안타까움

4월 3일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잊혀질 수 없는 아픔의 날입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억울하게 희생된 분이 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4.3진상조사 보고서에는 2만 5천~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나라의 중앙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4.3위원회의 위원장은 총리가 됩니다. 4.3특별법 제정 이후, 총리가 위원장이 되면서 위령제에 총리가 참석하는 것은 의례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파 정부라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더군요. 작년에는 한승수 총리가 모터쇼 참석을 이유로 4.3 위령제에 불참하는 일이 있었죠. 올해는 정운찬 총리가 참석한다는 내용을 하루..

불타 사라져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마을

제주4.3사건 진압과정 중 초토화작전으로 불타고 복구되지 못한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잃어버린 마을이 4.3보고서에는 83개나 있다고 합니다. (130개라고 적고 있는 자료도 있습니다.) 초토화작전 당시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중산간 마을들은 모두 소개되어 불타 사라졌는데, 4.3 진압 이 후 복구된 마을도 많지만 아예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습니다. 다랑쉬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입니다. 위치 경도 126 : 49 : 42 위도 33 : 28 : 1 아름다운 다랑쉬오름(월랑봉) 탐방로 입구에서 서쪽으로 약 100m 지점에 있습니다. 제주 동부 오름과 해안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고, 화산의 신비를 간직한 다랑쉬오름은 이제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바로 인근에..

도민의 기억속에서 지우고자 했던 4.3유적, 다랑쉬 굴 사건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빠져 4.3과 같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제가 바보였던 것일까요? 아래의사진을 가지고 다랑쉬 굴을 찾아 갔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 정도 사진이면 찾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 근처가면 작은 이정표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산산히 부서지고, 이정표는 커녕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시간여를 가시나무에 찔리며 억새밭을 헤매었지만, 찾아 오는 것은 갈증과 밤의 어두움 뿐이였습니다. 다랑쉬굴 사건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합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 속에 있는 사..

극단의 아름다움과 극단 폭력이 만났던 곳, 잃어버린 마을 - 무등이왓

잃어버린 마을은? 제주 4.3사건 진압과정 중 해안선에서 5km이상 들어간 마을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초토화작전’이 있었습니다. 중산간지역의 유격대에게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명분이였지만, 이로 인해 중산간지역 사람들은 무장세력과 무관하게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중산간마을이 불태워졌고, 또 많은 수의 마을들은 복구되지 못하고 영원히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위치 평화로에서 동광방향으로 빠져나오면 동광육거리가 나옵니다. 이 중 S-Oil 주유소 옆길로 빠져서 1km정도 가면 있습니다. 다음 스카이뷰로 보기 위도 126 : 21 : 8 경도 33 : 18 : 25 무등이왓 표석 아래의 표석의 전문입니다. 여기는 4.3사건의 와중인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

4.3사건의 전개 - 3. 경찰의 발포와 4.3발발

1947 3월 1일,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3.1절 기념 집회가 열린다. 당시 시위로 오인한 미군정과 경찰은 매우 민감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말을 타고 가던 경찰이 넘어진 아이를 밟고 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항의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이날 7명의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되었다. 3.10 도민 총파업 이 사건에 대한 항의는 3.10 도민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당시 총파업은 제주도 민·관을 통틀어 95% 이상이 참여한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총파업이였다. 제주도청, 법원, 검찰 등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 뿐만 아니라 일부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하였다. 레드 아일랜드, 레드 헌트 이에 대해 현지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

4.3사건의 전개 - 2. 자치에 대한 열망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된다. 내려진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간다. 미군 제59군정중대가 1945년 11월 9일 상륙하고 스타우트 소령이 제주도 도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 때 스타우트 군정관은 일제 시대에 일하던 경찰과 관리들을 재임용함으로써 민심을 자극하게 된다. 제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1945년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된다. 초기에는 미군정과 협력관계를 유지했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도민들이 직접 구성한 읍면리 단위까지의 도 전체 조직으로 성장하고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한다.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간부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소문난 친일파만이 배제되었을 뿐 이데올로기가 아닌 하나로 뭉친 제주도를 대표할 만..

4.3사건의 전개 - 1. 일본의 요새가 된 제주와 패망

일제시대 제주도는 일본군의 요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1945년 3월 ‘결 7호 작전’에 따라 제주에 제58군 사령부를 창설하고, 정예부대였던 만주 관동군 2개 사단을 비롯한 한반도 내 병력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일본군이 7만명에 달했다. (당시 제주인구 22만명) 이렇게 제주도는 일본군의 요새로 바뀌게 된다. 모든 전략 요충지에는 강제노역으로 땅굴을 만들고, 비행장이 확장되고, 각종 방어진지가 구축된다. [사진] 송악산에 배치된 대공포 [사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배치되었던 일본군 비행기 [사진] 모슬포에 배치된 무기들 다행히 미군은 제주도에 상륙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군의 패망으로 막을 내렸다. 아마도 당시 제주도에 미군이 상륙했다면 제주도는 오키나와..

제주해군기지와 제주4.3, 도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

2008년 9월 18일부터 2009년 6월까지 이어진 제주공항 집단 학살지에 대한 2차 유해 발굴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2차 발굴로 수습된 유해는 총 259구이며, DNA조사를 통해서 유족을 찾게 됩니다. 이명박정부 들어서 4.3추모사업 지원 예산이 대폭 삭감되고 있습니다. 추모사업이라고 건물 짓고, 박물관 만드는 일만 있는게 아닙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유해를 찾아 유족의 품으로 돌려 보내 드리는 것도 하나입니다. 이 처참한 사진을 보며 할말이 없습니다. 제주해군기지를 왜 반대하냐는 분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제주도민의 속을 들여다 본다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제주도민 9명 중 1명이 끌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도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서요. 사진처럼 처참한 몰골로 돌아 가셨습..

4.3을 제주역사가 아닌 대한민국의 역사로 받아주세요.

어제는 제주4.3사건이 일어난지 61주년이 되는 날이였습니다. 많은 유족과 도민들이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고, 4월 내내 도내 곳곳에서 4.3관련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61주기 4.3을 바라보며 몇 가지 느낌을 적어 보고자합니다. 4.3사건에 대해서야 이미 많은 글들이 있었으므로, 4.3진상보고서의내용으로 정리하겠습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밸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 제주도민은 가..

제주4.3평화공원의 공간들 - 1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백비 설명문 중에…] 전시실을 나서는 길에 4.3에 희생된 억울한 혼령들을 위로하는 글귀를 적어 붙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작은 소망을 적어 붙였다. 방사탑 – 제주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사진과 같은 형태의 방사탑을 쌓았다. 실제 방사탑들은 사진과 달리 제주의 거친 현무암으로 쌓아 졌다. 제주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