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잊혀질 수 없는 아픔의 날입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억울하게 희생된 분이 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4.3진상조사 보고서에는 2만 5천~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나라의 중앙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4.3위원회의 위원장은 총리가 됩니다. 4.3특별법 제정 이후, 총리가 위원장이 되면서 위령제에 총리가 참석하는 것은 의례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파 정부라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더군요.

작년에는 한승수 총리가 모터쇼 참석을 이유로 4.3 위령제에 불참하는 일이 있었죠. 올해는 정운찬 총리가 참석한다는 내용을 하루전인 4월 2일 한나라당 제주도당에서 밝혔습니다.

그런데, 4월 3일이 되고 보니 그게 아니였더군요. 뉴스에서는 천안함 수색 도중 안타깝게 돌아가신 고 한주호 준위님의 영결식에 참석을 했더군요. 

그리고 중앙방송에서는 해군장에 처음으로 참석한 정운찬 총리와 과거에 참석하지 않았던 총리를 비교하고 있더군요. 4.3위령제에 2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총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이야기 뿐만 아니라, 4.3위령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보도를 하지 않더군요.

총리 참석이 의례적인 4.3위령제에 참석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참석한 해군장 영결식에 참석했습니다. (물론 고 한주호 준위님을 추모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애통하게 생각하고 애도하고 있습니다. 단지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그렇게 일정을 바꿔 버렸습니다. 아직도 연좌제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억울함에 사무쳐있는 4.3희생자 유족분들에 대한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것이 참 애통할 뿐입니다.)

이는 우익세력의 눈치를 본 결정이 아니였나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방송에서 제주4.3 위령제를 다루는 뉴스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YTN은 24시간 천안함 사고 특보체제입니다. 다른 뉴스는 아예 다루지를 않더군요. 다른 방송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다못해 독도관련 뉴스도 하루 잠깐 다루고, 다시는 다루지 않더군요.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권에 부담이 되는 사안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짧게 다뤄버리고,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시켜 버리는 이런 언론을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덧붙여, 오늘 4.3관련 기사의 댓글을 보며 너무 화가 났습니다.

아직도 제주4.3희생자들을 빨갱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좌익세력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제주도만 그랬을까요?

당시 29만이였던 인구 중에 3만명이 죽어야 할 만큼, 10명 중 1명이 죽어야 할만큼, 제주도 사람들이 그렇게 잘살아서 좌익 사상을 무장하고 있었을까요?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입니다. 300개의 마을이 불태워지고, 마을 사람들이 학살되었던 그런 사건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연일 터지고 있네요. 이런 일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현 정부가 너무나 싫습니다. 

김길태 사건 생중계를 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발언을 묻어 버렸고... 안타까운 천안함 사고를 이용해, 일본의 독도 교과서 문제도 묻어 버리고 있군요.

그리고, 고 한주호 준위님 영결식 참석을 핑계로, 예정되었던 4.3위령제 참석도 취소해 버렸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 될 곳으로 장소를 급히 변경한 것이죠.

그래야 뉴스에 하루 종일 나올테니까요. 더구나 이전 총리와 비교하면, 괜찮은 총리 이미지도 만들 수 있었을 테니까요.


아래 사진은 작년 위령제 사진입니다.






잃어버린 마을은?

제주 4.3사건 진압과정 중 해안선에서 5km이상 들어간 마을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초토화작전’이 있었습니다. 중산간지역의 유격대에게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명분이였지만, 이로 인해 중산간지역 사람들은 무장세력과 무관하게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중산간마을이 불태워졌고, 또 많은 수의 마을들은 복구되지 못하고 영원히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위치

평화로에서 동광방향으로 빠져나오면 동광육거리가 나옵니다. 이 중 S-Oil 주유소 옆길로 빠져서 1km정도 가면 있습니다.

다음 스카이뷰로 보기

위도 126 : 21 : 8

경도 33 : 18 : 25

 

무등이왓 표석

 

아래의 표석의 전문입니다.


  여기는 4.3사건의 와중인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터이다. 약 300년 전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이래 4.3당시 동광리에는 무등이왓 이외에도 삼밭구석, 사장밭, 조수궤, 간장리의 5개 자연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주로 조, 메밀, 보리, 콩 등을 재배했고 교육열이 높아 일제 때에는 광선사숙과 2년제 동광간이학교가 세워졌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주민들은 도너리오름 앞쪽의 큰넓궤에 숨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눈덮인 벌판을 헤매다 유명을 달리했다. 한 할머니는 그 후 맷돌을 갈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난 돼지집에서 숨언 살아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아나수다” (난 돼지집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자식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아났습니다.) 4.3으로 무등이왓(130호)에서 약 100명, 삼밭구석(46호)에서 약 50명, 조수궤(6호)에서 6명이 희생됐다.

  인가가 자리했을 대숲을 지나 아이들이 뛰어 나올 듯한 올랫길을 걸어보라. 시신 없는 헛묘도 찾아보고 유일하게 복구된 간장리 마을을 지나 큰넓궤로 발길을 돌려보라. 평화를 기원하는 외침이 들려올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사실은 조금 아쉽습니다. 이 표석의 내용만을 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이야기도 많이 줄여 쓴 점도 그렇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적당히 적어서 넘어 가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요?

 

짙은 5월의 푸르름

60년 전의 이 마을은 어땠을까요? 이처럼 푸른 하늘아래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4.3이 터졌지만 아직은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이였으니, 마을사람들이 모여 보리를 수확하고 있었을 겁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 알 수는 없지만, 익어가는 보리를 보며 희망을 안고 있었을 겁니다.

 

초토화작전

이전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탄압은 1948년 11월 15일부터입니다.

“해안선에서 5km이상 들어간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해안 마을로 내려와라.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하겠다.”

초토화작전에 앞선 소개령이 당시의 상황에서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마을 유지 10명이 이유 없이 학살됩니다. 그 후 토벌대가 여러 차례 마을로 올라왔지만 피해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안마을로 내려간다고 해도 이미 ‘도피자 가족’이였기 때문에 산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던 와중 12월 12일, 잠복해 있던 토벌대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몰래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을 붙잡아 산 채로 화장시킨 학살극이 벌어 집니다.

이렇게 이 마을 주민들의 희생은 커져만 갑니다.

[사진] 대나무 숲이 이 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가도 가도 끝없을 것 같은 이 대나무 숲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새삼 일깨워 줍니다.

 

이 곳에 살던 주민들은 이 후로 더욱 힘겨워집니다. 인근에 ‘큰넓궤’라는 자연 동굴이 있습니다. 해안마을로 갈 수도 마을로 돌아올 수도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이 동굴에서 많을 때는 120여명이 60일 정도를 살았다고 합니다.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다시 토벌대였습니다.

[사진] 분명 이 곳에는 집이 있었을 겁니다. 눈 앞에 그려지시는 지요? 초가집이 앞에서 보리를 타작하는 어른들과 주위를 뛰어 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토벌대에게 발각된 이상 큰넓궤에 머물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한 겨울 추위가 문제이긴 하지만 더 깊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눈위에 남는 발자국 때문에 토벌대에게 발각되기는 너무나 쉽게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1949년 1월에 토벌대에 잡혀 서귀포 정방폭포 등에서 죄없이 학살되고 맙니다.

[사진] 어느 집으로 통하는 올레(골목)이였을 겁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초가집에서 누군가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주실 것 같습니다. 4.3이 우리 역사에 없었다면… 이 길의 운명도 달라 졌을 겁니다.

 

다른 곳이지만 시작된 이야기이니 조금 더 해볼까 합니다. 지금은 동양에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로는 가장 높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귀포 ‘정방폭포’가 4.3당시에는 최대의 학살터였습니다.

극단의 아름다움과 극단 폭력의 만남.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는 이런 만남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밤에 정방폭포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었죠. 억울하게 죽은 혼이 너무 많은 곳이기에 그랬던 모양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이 곳 또한 극단의 아름다움과 극단 폭력이 만났던 현장인가 봅니다.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슬픈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글 내용 중 일부는 "제주역사기행"을 참조했습니다.

  1. 아까시 2009.05.17 23:31 신고

    제주도에서 그런 슬픈일이 있었군요..

    • k2man 2009.05.18 14:18 신고

      네..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되겠죠.
      사실 제주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들이 많지만, 이런한 역사 때문에 심리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는 가고 싶은데, 갈수가 없으신가요?

다음 로드뷰로 제주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라산도 등산하고, 관광지도 둘러보고, 아름다운 길을 드라이브 해보시면 어떨까요? ^^

아름다운 제주의 구석 구석을 담아 주시고 계시는 다음 관계자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정방폭포입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정방폭포를 다녀 오실 수 있습니다. ^^

http://local.daum.net/map/index.jsp?cx=400058&cy=55410&level=2&panoid=1453178&pan=303.84164677605884&tilt=-5.506363143621874&map_type=TYPE_SKYVIEW&map_hybrid=true&map_attribute=ROADVIEW&screenMode=normal

 

정방폭포와 역사

 
[사진] 60년 전 정방폭포 사진입니다. 폭포 위에 있는 건물에 일제시대에 단추공장이였던 곳입니다. 4.3사건 당시에는 저 건물이 수용소로 쓰이고 폭포는 학살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서귀포라는 지명이 생기게된 이야기(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으러 왔던 서복(서불)이 서쪽(중국)으로 돌아갔다해서 서귀포라는 이야기)와 관련됩니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음을 근거로 한답니다.

여하튼, 정방폭포는 아름다운 풍경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의미를 갖고 있는 곳입니다.

 

 

올해도 제주에 봄은 오는가?

제주의 가장 잔인한 계절, 봄… 제주의 봄은 봄이 아니다.

제주도민들은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봄이 오는 것을 힘들어 한다. 자신의 가족, 친구의 할아버지, 삼촌… 제주도민 중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제주 4.3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4.3은 이념갈등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던, 한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인 25,000 ~ 30,000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던 4.3은 언제야 끝나, 진정한 제주의 봄이 찾아 올까요?

 

제주 4.3사건은?

 

 

삼일절 발포사건과 총파업

1947년 삼일절,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하면서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하게되고, 이와 별도로 경찰발포에 항의하며 3월 10일 총파업이 벌어집니다. 이 총파업은 관공서와 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관합동 총파업이었습니다.

이 후, 미군정 조사단은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으로 교체되고,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이 대거 제주로 들어와 주모자 검거작전에 나섭니다.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1048년 3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고, 한편으론 남로당 제주도당이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습니다. 초기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 증파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이 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명령을 내려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시작됩니다.

 

평화협상의 무산

한편 9연대장 김익령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고 맙니다. 이 후, 평화적 해결을 원하던 김익령 9연대장은 교체되고 맙니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6월 18일에는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후 잠시 소강국면을 맞았으나,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 북한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4.3사건은 지역문제가 아닌 정권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합니다. 이 때 제주에 파견될 예정이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계엄령과 초토화작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에 앞서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이 때부터 그 무시무시한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이 시작됩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해안 마을로 소개당하고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며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다시 숨기 위해 한라산이나 동굴 등으로 몸을 피하는 주민들이 많아졌으나, 잡혀 사살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가족중 한명이라도 없는 경우, 그 가족을 모두 죽이는 학살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주 4.3은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까지 실로 7년 7개월간의 아픈 역사입니다.

 

위 글은 제주4.3연구소( http://www.jeju43.org )의 4.3개요를 참조하였습니다.

올해는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마무리된 제주 4.3사건 발생 61주기입니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주 4.3사건은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이 3만명 가까이나 희생된 안타까운 현대사입니다.

사실 그 규모에서 본다면 한국판 킬링필드라고 불릴만할 정도입니다. 초토화작전으로 아예 불타 사라져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살지 않는 마을만 수십, 수백에 이를 정도입니다.

 

3만명이 희생됐다?

관련글 : 올해도 봄은 오는가? 제주 4.3 그 끝은?

제가 왜 피해규모를 3만명으로 소개했냐면, 4.3진상위원회에서 당시 피해에 대해서 신고를 받았습니다. 신고된 사망 및 실종자만 1만 5천이 넘었죠. 50년이 넘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이미 숨진 목격자나 유족들을 추측할 때 더 많아진다는 결론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자체가 몰살되어 유족조차 없는 경우도 많은 것도 이유입니다.

여기에 더욱 가슴아픈 이유는 함부로 4.3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가 잡혀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최근에도 4.3과 관련된 보고서를 만들었던 제민일보 기자라든지, 독립영화 감독 등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조사를 받았을 정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당시 미군이 작성했던 보고서에도 약 2만 8천여명으로 보고되고 있고, 80%정도가 진압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는 피해규모를 8만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관광서비스지역인 제주도는 여초지역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웠던 내용입니다. 서비스업이 발달한 지역은 여성 인구가 많은 여초지역이다. 사회시간에 이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올해부터 제주도는 남초지역입니다. 남자인구가 더 많아졌죠. 제주도는 관광서비스업이 더욱 발달하고 있는데, 왜 여자가 아니라 남자 인구가 늘어났겠습니까?

결국 사회시간에 배운 내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제주도가 여초지역이 되었던 이유는 한국현대사에 있습니다.

일본의 강제징용, 한국전쟁과 더불어 남자를 몰살시켰던 4.3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구 30만의 제주도에서 남자 수만명을 죽였으니 (당시 여성 피해자도 많았습니다. 다만 남자 비율이 더 높았죠) 제주도에 남자가 일시적으로 크게 줄어버렸던 것입니다.

 

제주도는 변방의 땅

정확히 11년전, 평화공원이 생기기 전에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밤새 진행되 아침에야 끝난 본풀이 굿을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국내언론의 무관심에 놀랐었죠.

중앙에서 취재도 없을 뿐더러 제주권 방송에서만 잠시 촬영을 하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침까지 남아서 끝까지 촬영을 하고 돌아간 방송사가 한군데 있었습니다. 그 방송사는 다름아닌 NHK였죠.

참 가슴이 아픕니다. 아픈 역사를 묻어버리라고만 하니….

이 번 글은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있었던 위령제 이야기입니다.

 

대학교 새내기였던 1998년에 위령제를 찾았던 이 후로 11년만에야 위령제를 다시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한라체육관에서 밤새 굿을 했었죠. 제주도 전통대로 심방(무당)이 나서서 진혼굿을 했습니다. 어찌보면 지금의 틀에 박힌 위령제보다 당시의 진혼굿을 밤새 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밤 새 굿을 하며 혼령을 위로하고, 굿을 마치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며 놀다가 음식을 나눠먹는…

진정 화해와 상생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웬지 위령제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한다기 보다는 행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1998년 위령제에서 유일하게 밤새 모든 화면을 촬영해 간 방송사가 한 군데 있었습니다.

그 곳은 다름아닌 일본의 NHK였죠. 참… 아이러니 하지 않나요?

 

4월 3일의 제주4.3평화공원 - 2

 

 

사전 행사로 몇 가지 공연(?)이 있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찾으셨습니다.

관계자들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유족들이겠죠.

평일이라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가 형식을 갖춘 위령제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런 모습 때문입니다.

가장 첫 식순이 이명박대통령의 헌화였죠.

사진은 의장대가 이명박대통령의 이름이 있는 화환을 옮겨 헌화하는 장면입니다.

 

유족분들은 얼마나 미울까요? 4.3진상을 자꾸만 깍아 내리는 현 정부를 얼마나 미워할까요?

그래도 차분히 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진은 대통령 헌화에 이어 정부대표, 제주도지사 등이 헌화하는 장면입니다.

유족보다 이 분들의 헌화가 앞서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이 놈의 권위주의는 …

 

 

해원과 진혼 …

아마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유족분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었겠죠.

 

 

묵념을 하라는 사회자의 말에 가던 길을 멈추시고 정성스레 묵념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후에 사진은 없습니다.

눈물 바다를 이루던 유족들의 헌화 장면은 다른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노무현대통령님께서 서거하시고 돌이켜보니, 제주4.3사건이 전국적으로 인식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노무현대통령님께서 마련해 주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3년 제주4.3진상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가 마무리되고 정식 보고서가 채택되었으며, 해당 연도에는 노무현 대통링께서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2006년에는 역대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제주4.3추모행사에 참석하셨습니다. (올해에는 대통령은 물론 4.3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 조차도 참석하지 않았죠.)

이번 글을 시작으로 제주4.3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4월 3일의 제주4.3평화공원 - 1

지난 2009년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이 날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 제막식도 있었습니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의 성함과 지역, 당시 나이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 4.3평화공원에서 수많은 유족들이 찾아와 당신들의 부모나 형제의 이름을 확인하고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5살도 되지 않는 영아는 물론 60세가 넘는 어르신, 여성 할 것 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날은 제주도에서 가장 슬픈 날입니다.

어릴 때 돌아가셨는지 요구르트도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제단에 올려놓고 추모하시는 많은 분들이 계셨죠.

 

 

어디를 저렇게 보고 계실까요?

당신의 남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까요?

어찌 글도 모르시는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 갔을까요?

당시 미군 보고서에는 제주도민의 80% 이상이 빨갱이라고 했죠.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날 가슴 아픈 풍경이 곳곳에 이어졌습니다.

 

이명박정부들어 꾸준히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는 보수진영에 할말을 잃습니다.

 

정부에서도 기존 계획되었던 기념·추모사업을 축소하거나 취소시키고 있습니다.

4.3위원회도 통폐합을 시도하고 있죠.

 

보수진영에서는 다시금 제주도민과 당시 희생되신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고,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했던 사람들을 위인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일본의 이번 망언으로 제주도민으로써 말로 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전에는 우리나라의 한 국회의원이 제주도 독립이 어쩌고 말을 했다가 제주도민에게 엄청난 질타를 받았었습니다. 제주도가 왜 그리 민감한지, 제주도의 근현대사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것은 일본이나 국내 정치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4.3사건 등으로 큰 난리를 겪었던 제주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당선되려면 무조건 "무소속"으로 나와야 한다는 말이 있었고, 최근에는 조금 다르지만 한때는 실제로 그랬었으니까요.)

근현대사에 있어서 제주도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학살과 피해를 겪지 않은 지역이 없겠지만, 제주도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될 날이 멀어 보입니다.

제주도의 근현대사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 대정으로 가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일제는 오키나와가 점령당하자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기 시작합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결7호 작전(제주도 방어 작전)을 세우고 관동군 2개 사단과 일본 본토 부대까지 7만 5천이 넘는 병력을 제주도에 집결시킵니다.

1. 송악산 해안진지동굴

대장금의 마지막 이 장면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이 장면의 장소가 다름 아닌 송악산 해안 땅굴입니다. 가미카제 작전이 비행기를 이용한 작전만 실행에 옮겨 졌지만, 실제로는 자폭 고속잠수정 작전까지 존재합니다. 해안으로 오는 적 상륙함대를 맞서기 위한 자폭 잠수정을 숨겨두기 위해 만들어진 해안 땅굴이 바로 이 곳입니다.

 

2. 비행기 벙커

이 대정지역에는 이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유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바로 이 지역에는 알뜨르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비행장으로 당시 제주비행장이던 제주공항과 함께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비행장에 보관되는 항공기의 벙커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 가면 수 십개의 벙커가 있습니다. 직접 가보니 콘크리트 두께가 1m가 넘을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어 졌으며, 과거에 이 벙커들을 철거하려고 폭약을 터트려도 도저히 부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의 스카이뷰로 본 사진입니다. 빨간색 원 부분이 바로 저런 벙커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실제 그 지역을 가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3. 알뜨르 비행장

이 뿐만 아닙니다. 당시 알뜨르 비행장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일제에 강제로 빼앗겼던 비행장부지는 아직도 지역주민에게 돌려지지 않고 공군에서 점유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비행장은 아래 사진보다 훨씬 넓지만 우습게도 공군에서 지역주민에서 밭으로 일부를 임대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있는 부분은 유사시를 대비해서 항상 이런 상태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지역주민 소유였던 땅이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이후로 아직까지도 반환되지 않고 국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히려 지역주민에게 임대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4. 백조일손지묘

이 지역의 아픔은 또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일명 '백조일손지묘'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 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4.3사건과 6.25를 거치며 누명을 안고 학살된 분들을 모신 곳입니다. 이 당시 학살터는 제주도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습니다. 당시 학살된 사람만 적게는 2만, 많게는 8만까지 보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불타버려 증언해 줄 사람조차 없으니 말입니다. 신고된 사람만 2만 가까이 됩니다.

최근 4.3사건에 대해서 노무현대통령이 사과하고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와중에, 이에 대해서 우익단체에서 헌법소원까지 냈더군요.

이 곳이 그 분들이 돌아가신 곳입니다. 둘레가 500m는 될만하고 깊이가 20m는 됨직한 큰 구덩이 입니다. 이 구덩이에서 수 백명이 학살되었고, 후에 이 시신들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시신이 모두 엉켜있어 신원을 구분해 수습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충 유골을 사람 수만큼 수습하여 위에 나온 사진처럼 한 곳에 모셨습니다. '백조일손지묘'라는 이름도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습니다. 시신들이 모두 엉켜 있었어서 유족들 모두가 한 자손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5. 육군 제2훈련소 터

마지막 사진은 6.25전쟁 당시의 육군 제2훈련소 정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전쟁에 나갈 젊은 남자들을 끌어 모으지만 훈련시킬 적당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육군 훈련소가 생기게 됩니다.

6.25당시 이 대정지역이 제2훈련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정 입구 대도로변에 덩그러니 두 개의 콘크리트 기둥만이 남아 있습니다.

제1훈련소도 인접한 중문 근처 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끝나면서 제1훈련소는 폐쇄되고 대정에 있던 제2훈련소는 논산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논산의 제2훈련소가 숫자 2를 빼고 육군훈련소란 이름으로 바꾼지도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현장 사진이 많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항공사진으로 대체를 해서 많이 아쉽습니다.

다음 번에는 좀 더 많은 현장 사진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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