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제주에 봄은 오는가?

제주의 가장 잔인한 계절, 봄… 제주의 봄은 봄이 아니다.

제주도민들은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봄이 오는 것을 힘들어 한다. 자신의 가족, 친구의 할아버지, 삼촌… 제주도민 중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제주 4.3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4.3은 이념갈등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던, 한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인 25,000 ~ 30,000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던 4.3은 언제야 끝나, 진정한 제주의 봄이 찾아 올까요?

 

제주 4.3사건은?

 

 

삼일절 발포사건과 총파업

1947년 삼일절,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하면서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하게되고, 이와 별도로 경찰발포에 항의하며 3월 10일 총파업이 벌어집니다. 이 총파업은 관공서와 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관합동 총파업이었습니다.

이 후, 미군정 조사단은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으로 교체되고,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이 대거 제주로 들어와 주모자 검거작전에 나섭니다.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1048년 3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고, 한편으론 남로당 제주도당이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습니다. 초기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 증파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이 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명령을 내려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시작됩니다.

 

평화협상의 무산

한편 9연대장 김익령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고 맙니다. 이 후, 평화적 해결을 원하던 김익령 9연대장은 교체되고 맙니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6월 18일에는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후 잠시 소강국면을 맞았으나,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 북한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4.3사건은 지역문제가 아닌 정권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합니다. 이 때 제주에 파견될 예정이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계엄령과 초토화작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에 앞서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이 때부터 그 무시무시한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이 시작됩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해안 마을로 소개당하고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며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다시 숨기 위해 한라산이나 동굴 등으로 몸을 피하는 주민들이 많아졌으나, 잡혀 사살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가족중 한명이라도 없는 경우, 그 가족을 모두 죽이는 학살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주 4.3은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까지 실로 7년 7개월간의 아픈 역사입니다.

 

위 글은 제주4.3연구소( http://www.jeju43.org )의 4.3개요를 참조하였습니다.

+ Recent posts